학교소개

화성학교 11월

  •  

    교    장:  김준혁(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화성전문가)
    주    제:  깊은 가을, ‘정조의 꿈길’ 함께 걷는다
    기    간:  2019년 11월 16일(토)
    참가비:  9만원

강의계획

*강의 마감됐습니다^^


깊은 가을, ‘정조의 꿈길’ 함께 걷는다
2019년 11월 화성학교 <수원 화성(華城)과 융건릉·용주사 답사>

수원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화성(華城) 및 그와 가까운 융건릉(隆健陵)·용주사(龍珠寺) 등을 돌아보며 정조대왕의 깊은 뜻과 아름다운 꿈을 공부하는 <화성학교>가 11월 16일(토요일), 당일로 제10강을 엽니다. 이번 화성학교 가을 답사는 수원 화성 답사로 끝내지 않고 오랜만에 융건릉과 용주사 답사까지 진행합니다. 교장선생님은 ‘화성박사’인 김준혁 교수(한신대)입니다.


▲가을에 더욱 아름다운 수원 화성 ⓒ화성학교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 만큼 성을 많이 쌓았죠. 그 중에서도 수원 화성은 ‘성곽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우수한 기능을 갖춘 조선시대 성곽입니다. 유네스코는 1997년에 수원 화성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화성과 함께 정조 어진 봉안전이자 우리 역사 최고의 건축물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화령전(華寧殿)이 2019년 8월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3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조의 왕릉인 건릉(健陵)과 장조(莊祖)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왕릉인 융릉(隆陵)은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융릉과 건릉의 원찰인 용주사는 조선 왕실 원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모두 이번 답사에 찾아 갈 것입니다.

김준혁 교장선생님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군주라고 평가받는 정조가 세운 수원 신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정조가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만든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습니다. 훗날 정조를 공부하면서 정조가 대유평이란 이름을 지은 의미를 알고, 미리 알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함께 등교할 때 힘들게 페달을 밟으면서도 하루에 한 꼭지씩 역사 이야기를 해준 것이 가슴에 남아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중학교 역사교사를 하다가 교원노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5.16군사쿠데타로 해직되어 중등과정으로 돌아가지 못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민초들의 역사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정조를 전공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이후 수원시가 본격적인 화성 복원 사업을 추진할 때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컨텐츠 개발에 참여하였고, 이후 화성박물관 건립을 주도하여 학예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신대학교에서 정조교양대학을 설립하면서 이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이 바로 정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있고, 화성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화성의 우수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조시대 개혁과 민본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화성이 기다린다. ⓒ화성학교

교장선생님은 <화성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최근 대한민국 역사교사 100명에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 100명을 추천받았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였습니다. 2위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고 3위가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백성의 나라, 그가 추진하였던 소통의 정책이 오늘 이 사회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가 너무도 과대 포장되어 그가 추진했던 모든 일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전근대 그 어떤 국가지도자들보다 백성을 위해 헌신한 그 같은 국왕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운 개혁 기반도시 화성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찾는 역사문화도시가 된 것입니다. 화성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입니다. 성곽의 웅혼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아름다움이 곧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정조의 표현대로 화성의 아름다움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 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본주의입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참여한 기술자와 날품팔이들 모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막기 위한 척서단과 오늘날의 영양제인 제중단을 하사하고 겨울에 솜옷과 털모자를 주었습니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당상관 이상 되는 고위직들이나 썼던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축성에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하사하였으니 이들의 기쁨은 그 무엇보다 컸을 것이고 국왕의 따스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화성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라 조선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의식 혁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잔치를 하고, 여성이 상위에 남성이 하위에 자리하며, 조선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백성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은 근대화로 나가는 시대의 변화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모두 화성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화성 안에는 국방 개혁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최강의 군대라고 평가받는 장용영 군사들이 주둔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가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예24기를 익히고 그 무예를 토대로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화약 신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성공시켰습니다. 중국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약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의 흔적이 지금 화성에 오롯이 남아 무예24기를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화성을 찾아가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조가 꿈꾼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주적인 나라만들기의 모든 것을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이 저와 함께 정조시대 역사의 길을 걸으며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국가,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미려(美麗)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정조 Ⓒ수원시

김준혁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인 화성과 융건릉, 용주사에 대해 자세히 들어봅니다.

우리는 왜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방문할까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상징이자 정조시대 개혁정치의 산물입니다. 정조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기반도시로서 화성을 축성하였습니다. 더불어 조선시대 모든 문화적 역량을 동원하여 변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 화성을 건설하였습니다.

정조는 모든 백성들을 평등한 신분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펼쳤고 이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한 공간으로 화성을 축성한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정치적 행위 공간을 서울의 창덕궁이나 경희궁이 아닌 이곳 화성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정조에게 서울은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자신이 새로 조성한 신도시 수원에서 상왕(上王)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성곽이 필요했고 이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가 설계하고 마찬가지로 최고의 기술자들이 축성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화성에는 조선, 중국, 일본의 성곽 장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서양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여 그것을 조선화 하고자 했던 정조와 당대 학자들의 포용력이 보여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배척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 화성에서 극명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중국식 건물인 듯하면서도 조선식이요, 일본식 성벽인 듯하면서도 조선식인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조시대에 우리 산천을 고민하고 우리 민족의 삶을 고민하는 진경문화가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고 조선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조선중화주의가 나타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상에 대한 포용과 관용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포용정신은 화성 축성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의 신분이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밑으로는 승려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계층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화성 축성에 참여한 이들은 신심을 가지고 화성 축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결과 10년 예상의 공역이 3년이 채 되지 않아 마무리된 것입니다.

또한 화성에는 당대 최고의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비롯한 왕실의 최고급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문화의 땅입니다. 아울러 낙성연에서 보여주듯이 왕실문화와 산대희를 비롯한 평민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상하동락(上下同樂)의 땅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조선 역사상 국왕이 직접 백성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준 민본주의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어찌 화성을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정조시대 정신과 사상의 결정판으로 인해 완성된 화성이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제 세계 속의 역사문화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민본의 땅을 보기 위하여 화성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화성행궁 Ⓒ수원시

정조대왕은 왜 화성을 건설하였나

화성은 어떠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화성이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을 심사하고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군대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고 조사한 국제기념물유적협회는 “화성은 18세기 군사건축물을 대표하여 유럽과 동아시아의 성곽 쌓는 제도의 특징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네스코 심사위원으로 화성을 방문한 스리랑카 실바(Nimal De Silva) 교수는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안 됐지만 성곽의 건축물이 동일한 것이 없이 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심사위원들은 정조대왕께서 화성을 축성하실 당시 백성들에게 일한 만큼의 돈을 주고 거중기를 비롯한 과학적 기계를 이용하여 성곽 축성에 참여한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고자 했던 인본주의도 높은 평가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성곽,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정신이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정조의 인본주의와 조선 전체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깊은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정조는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화성 축성의 설계를 정약용에게 맡겼습니다.

1789년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수원부 중심지(현재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로 들어서자 그 곳에 있던 관청과 200여 호의 민가를 값에 맞게 보상금을 주고 팔달산 동쪽 넓은 들판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팔달산 동쪽 지역이 새로운 수원의 중심지이자 조선의 개혁 터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수원 이외의 지역에서 새로 이사 온 사람들까지 합하여 319호가 새로운 수원의 중심지에 정착하였습니다.

이후 정조는 1793년 1월에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을 시키면서 도시 이름도 아예 화성(華城)으로 바꿨습니다. 이제 도시 이름이 수원이 아닌 화성이 된 것입니다. 화성은 정조대왕께서 특별히 지으신 이름인데 ‘화(華)’라고 하는 말에는 부(富), 수(壽), 다남자(多男子)가 담겨있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화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인구가 번성하여 큰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 이름을 화성으로 변경하고 위상을 높인 것은 바로 화성에 성곽을 축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훗날 자신이 내려와 살 것을 대비하기 위하여 국왕이 머무는 도성 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기에 정조는 미리 준비를 한 것이죠. 정조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고 어떠한 무기에도 무너지지 않을 성곽을 설계할 사람은 정약용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 전 한강의 배다리 설계를 성공리에 마친 것을 누구보다도 정조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친(정재원)이 돌아가셔서 상중에 있는 정약용에게 은밀히 화성 설계를 지시하였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수원을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기 전인 1792년 12월이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정조가 정약용을 사랑하고 신뢰한 것입니다. 당시 수원도호부에 성곽을 축성하는 것을 알고 있는 인물은 정조와 화성성역총리대신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아 새로 옮긴 수원부를 위한 성곽 계획안을 축성 공사 개시 2년 전에 작성하였습니다. 다산이 계획한 축성안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성곽 규모를 적절히 조정하고, 지금까지 조선의 성에 설치되지 않았던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추어 성의 방어력을 높인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조선의 성이 임진왜란으로 무참히 허물어져 성곽의 방어 체제와 능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낸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전쟁이 끝난 후 <징비록>이란 책에서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이 갖춰져야 한다”고 거듭 역설하였습니다.

다산은 모두 7편의 글을 작성하여 국왕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곧 <성설(城設)> <옹성도설(甕城圖設)> <현안도설(懸眼圖設)> <포루도설(砲樓圖說)> <누조도설(漏槽圖說)> <기중도설(起重圖說)> <총설(總說)>이 그것입니다. 이 글들은 화성의 기본적인 형태와 규모, 각종 방어시설, 그리고 축성공사와 관련된 공사 방법 등을 적은 것입니다. 이 가운데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방식 등 전반에 걸친 내용을 기술한 것이고 나머지 <옹성도설>이나 <포루도설> <누조도설> 등은 성벽에 설치하는 각종 새로운 시설에 대한 설명이며 마지막의 <기중도설>은 석재를 들어 올리는 기계장치인 거중기에 관한 설명입니다. <성설>에서 다산은 화성의 전체 규모를 3,600보로 잡았습니다.

정약용은 3년간의 부친상을 마친 후 1795년 윤2월의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의 기획과 진행을 맡았고, 이후 화성 축성이 완공될 때까지 화성성역총리대신인 번암 채제공과 화성 축성의 전반을 맡아 지휘하였습니다. 이러한 당대 최고의 실학자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화성은 세계 유수의 성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진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융릉Ⓒ화성학교

융건릉(隆健陵)은 어떤 곳인가

18세기 문화의 총화가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인 융릉(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고 나서 붙여진 이름이며 세자 신분일 때는 현륭원이었음. 건릉은 정조의 능)에 담겨있다고 말하는 연구자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이야 융릉이 있는 지역이 세계적인 축구스타 박지성이 다녔던 안룡중학교가 있는 동네로 더 유명해졌지만 실제 융릉이 있는 곳은 1789년 이전까지 수원도호부의 읍치가 있던 역사적 도시였습니다. 비록 임금님이 살고 있는 한양처럼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서해안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아내는 큰 군사도시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수원도호부와 관련된 각종 읍지에 의하면 수원 사람들 혹은 지금의 화성 사람들은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수원 지역이 현대사에 들어와서도 유명한 주먹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지금 융건릉 일대가 있는 안녕면은 과거 현재의 수원·화성·안산·평택의 중심지였습니다. 수원도호부의 관아가 있던 이곳을 중심으로 서해안을 방어하는 방어영(防禦營)의 군사들이 즐비했고,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조운선의 휴식처를 위한 포구와 이들을 유혹하는 기생집들 역시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지역은 인근 도시들을 포괄하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관리들과 유생들이 밀집되어 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의 22대 국왕이었던 정조가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하게 되었고 지역 백성들은 국왕의 명을 받아 새로운 터전인 팔달산 동쪽 들판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국왕의 명령이 있었던 날이 1789년 7월 15일이었으니 이 날이 기쁜 날인지 슬픈 날인지 정확히 규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지역 거주자들은 아마도 우리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신도시 추진계획으로 집단이주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수원 사람들을 왜 이전하게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신을 낳아준 생부(生父)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뭐고 생부는 무엇인가요?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은 인물입니다.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큰 대역죄를 저질렀기 때문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대역죄인의 아들은 국왕이 될 수 없었기에 영조는 세손이었던 정조를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게 하였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정조를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왕실의 족보를 수정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가 정조의 아버지이고 사도세자는 생부(生父)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의 공식적인 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늘 자신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애끓는 사부곡(思父曲)이 있었기에 큰아버지이자 족보상의 아버지였던 효장세자를 추존하듯이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국왕으로 있는 동안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인 영조가 생전에 세손이었던 정조가 국왕으로 있는 한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그 대안으로 사도세자의 묘소를 당대 최고의 묘자리에 이장해주는 것이 최선의 효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명당자리에 잠들고 있는 사도세자는 역적이 아닌 국왕의 아버지라는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정조가 대리청정하는 과정에서 사도세자의 묘소였던 양주 배봉산의 수은묘(垂恩墓)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도 작고 초라한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세자의 묘소이지 일반 왕자의 예법대로 만든 작은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참으로 묘한 이중행동을 하였습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그에게 세자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세손이었던 정조를 불러 자신이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세손과 채제공 앞에서 사도세자가 죽은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김상로와 홍인한 등 노론 주도세력의 간악한 사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글을 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더구나 세자의 장례식에 직접 묘소까지 찾아가서 제문을 읽는 등 죽은 아들에 대하여 엄청나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도세자의 묘소였던 ‘수은묘’는 규모를 일반 왕자의 예법에 맞춰 공사를 지시하고 위상 또한 왕자의 예에 따르게 하였습니다. 세자가 죽어 묻힌 곳을 ‘원(園)’이라 칭하여야 함에도 영조는 끝내 일반 왕자의 무덤에 붙이는 ‘묘(墓)’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몰아내고자 했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괘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 수은묘를 방문하고 나서 참혹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국왕으로 즉위하면 반드시 아버지의 묘소를 조선 땅에서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옮겨 주자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국왕이 되었어도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정조실록>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를 즉위년부터 옮기려고 했는데 ‘운(運)’과 ‘때[時]’가 맞지 않아 옮기지 못했다고 정조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정조의 즉위년인 1776년부터 묘소를 옮기기로 결정한 1789년까지 모두 사도세자의 ‘운’이 무덤 천장의 운과 들어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조는 훗날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장하도록 지시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즉위년부터 옮기고자 했는데 하늘의 운과 땅의 때 그리고 사람의 운이 맞지 않았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행간을 읽는 것이 중요한데 그 ‘운과 때’보다는 정조가 아버지의 묘소를 옮길 수 있을 만큼 국왕으로서의 힘이 없었고 더불어 국가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정조가 특히 수원도호부 관아가 위치한 화산을 사도세자의 묘소 자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세자 자신이 그 자리를 천하명당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15세의 나이부터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영조와의 불화로 인하여 건강이 극도로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온양온천행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부친 영조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었겠지만 사도세자로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수원도호부에 도착한 세자는 효종의 능역 자리로 선정된 바 있는 그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능터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효종이 죽고 나서 남인의 영수이자 효종의 스승이었던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왕릉 자리로 수원도호부 관아 뒤편의 화산으로 선정했었다는 것을 사도세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서인의 영수로 윤선도와 정적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반대로 끝내 왕릉으로 사용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처음 효종의 능터로 정해진 현장에 도착한 후 이곳이 진정 천하명당임을 확인하고 좋은 곳이라 감탄을 할 정도였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그 자리가 좋다고 했던 것이 아마도 머지않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이 자리에 묻혀 주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정조는 스스로 사도세자의 일대기를 저술하면서 사도세자가 화산의 능터에 대해 극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이러한 속내가 바로 수원으로 묘소를 이전하게 한 진실한 내용이었습니다. 부친이 원하는 곳에 묻어주고 싶은 자식의 마음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천장 결정 다음날인 7월 12일 수원도호부 읍치로 내려간 영의정 김익을 비롯한 신하들은 현재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가 모두 천하명당인데 그 중에서도 수원도호부가 있는 화산이 최고 명당이라고 하였습니다. 용의 여의주를 희롱하는 ‘반룡농주(盤龍弄珠)’라는 것입니다. 실제 이 지역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속리산으로부터 ‘지기(地氣)’가 시작되는 한남금북정맥의 혈(血)이 마지막에 모인 그야말로 천하명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묘한 것은 이 지역의 오랜 지명이 용복면(龍伏面)이었습니다. 즉 용이 엎드려있는 지역이란 의미였는데 결국 용과도 같은 존재인 사도세자와 뒤이어 정조가 묻혔으니 선현들의 땅이름 만들기는 신령스럽다 하겠습니다.

신하들은 수원도호부에 사도세자의 봉분이 들어설 자리를 확정하고 도성으로 올라와 7월 15일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도호부 관아 뒤편으로 이전하고 수원도호부 관아와 중심지역 백성들의 민가를 팔달산 동쪽의 넓은 들판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 최초의 신도시 건설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조가 수원도호부로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전한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그는 단지 억울하게 돌아간 부친을 위한 개인적인 효심 때문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이전한 것일까요? 지금까지 그런 평가가 있었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조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즉위 하였을 때 조선이라는 국가의 상태가 ‘혈맥이 막혀 죽어가는 사람과 같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입니까! 오랫동안의 당파 싸움과 천재지변이 나라의 형편을 너무도 어렵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고자 하였지만 한양을 기반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의 힘은 너무도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국왕을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친위도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 이전을 통해 충청·전라·경상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교통로에 위치한 팔달산 동쪽의 넓은 들판을 주목한 것이고 바로 이 지역에 신도시 수원을 건설한 것입니다.

결국 정조의 사도세자 묘소 이전이 갖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국왕 정조의 효심만이 아닌, 국가 전체를 살리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자는 개혁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현륭원 조성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집권 13년 동안 이룩한 문화의 성숙도를 사도세자의 묘소에 투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이 18세기 우리 문화의 총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주사 대웅보전Ⓒ화성학교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원찰 용주사

조선 왕실 원찰의 대명사는 단연코 용주사(龍珠寺)입니다. 또한 정조(正祖) 하면 떠오르는 절집이 바로 용주사입니다. 용주사는 일반적인 사찰의 양식과 전혀 다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찰 건축을 잘 모르는 분들이라도 이곳이 유교식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왕실과 밀접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그렇다면 용주사는 어느 시기에 왜 건립 되었을까요?

-용주사는 어떻게 창건되었나
<영원한 제국>과 <이산> 등 영화나 텔레비전의 각종 드라마를 통해서 정조의 파란만장한 삶은 국민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소설과 영화, 드라마의 내용은 과장과 허구가 많기에 진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실 정조의 삶은 소설보다 더욱 드라마틱합니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한을 풀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즉위 13년(1789)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현륭원 원찰 용주사를 창건한 것입니다.

현륭원과 용주사의 창건은 거의 1년 간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곧 용주사의 창건 계획은 현륭원 천봉과 동시에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의 추측대로 사실입니다. 현륭원의 천원(遷園)은 1789년(정조 13) 7월 박명원(朴明源)의 상소로 시작되어 10월 13일에 현륭원의 공역이 완료되었습니다. 박명원은 영조의 부마요, 정조의 고모부로서 정조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명원이 올린 사도세자 묘의 이장 상소는 이미 정조와 깊은 교감을 한 상태였습니다. 공역이 완성된 직후인 10월 17일 현륭원 공역 담당자였던 원소도감당상(園所都監堂上) 이문원(李文源)이 새로운 원소(園所)에 원찰을 설치하자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에 정조는 흔쾌히 원찰의 설치를 지시하고 이로써 용주사가 건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용주사 건립은 이미 박명원의 현륭원 천봉 상소가 있은 후 정조의 의중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륭원 천봉 역시 정조와 사전 협의 후 박명원의 상소가 있었듯이 정조는 자신의 뜻을 직접 말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으로 하여금 조정에 건의케 하여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문원이 정조와 상의 없이 현륭원의 원찰 건립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전국의 원찰을 혁파했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원찰제도를 부활하자고 자신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으니 측근 신하를 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용주사의 창건은 정조의 강력한 의지와 그의 측근들의 동의에 의한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역사적 의미
정조는 용주사 창건을 통해 외적으로는 불교의 효순사상(孝順思想)이라는 명분을 통하여 집권 유생층의 반발을 막으며 생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주게 하였고, 내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통한 정조 자신의 정통성 확보라는 왕권강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창건한 용주사로 하여금 전국 사찰을 다스리고 의승군을 통솔하게 하여, 의승군 전체를 왕의 직속부대화 함으로써 군사적 힘을 증강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용주사의 창건이 갖는 의미는 이단(異端)으로 매도되어 억눌려 오던 조선불교계가 세상에 새롭게 몸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용주사의 창건 이후 19세기에 들어와 치열한 선(禪) 논쟁이 전개되고 고승대덕의 출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조선불교가 외압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발전을 통하여 끊임없는 수행과 발전을 이루어 현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화성Ⓒ두산백과

2019년 11월 16일(토요일), 화성학교 제10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8:00 서울 출발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0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화성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0강 여는 모임.
-화성행궁 도착. 화성행궁, 화령전 답사
-화성 답사(서장대, 화서문, 서북공심돈, 장안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연무대)
-점심식사 겸 뒤풀이(화성 안 <화청갈비>)
-융건릉 이동
-융건릉 답사
-용주사 이동
-용주사 답사
17:00 서울 향발. 제10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수원 화성과 융건릉·용주사 답사지도Ⓒ화성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11월 화성학교 참가비는 9만원입니다(강의비,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비 송금계좌 국민은행 730601-04-041406 문화문 인문학습원). 버스 좌석은 참가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은 현재 화면 상, 하단에 위치한 <참가신청> 아이콘을 누르시면 신청서 작성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문의는 전화 050-5609-5609/010-9794-8494번(월∼금요일 14:00∼18:00시. 공휴일은 제외), 또는 이메일 huschool@naver.com을 이용해주세요.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당일 안에 보내드립니다.

▷간단한 참가신청방법 : 휴대폰 문자로 성명, 화성학교(11월), 그리고 가능하면 이메일 주소를 전화 010-9794-8494/010-5302-4256번으로 보내주시면 바로 처리해드립니다(준회원 대우)^^
▷화성학교 카페 https://cafe.naver.com/hwaseong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화성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을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 금감원의 보험사 개인정보 보안강화 규정으로 여행자보험 단체가입이 어렵고, 다른 보험에 가입한 경우 중복보장이 안 되는 등 실익이 크지 않아 여행자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은 개인 가입을 하시고, 이동시 '안전'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는 보험 가입이 돼 있습니다.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하여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세요.


*참고로 간편하게 가입할 수 있는 여행자 보험 사이트를 안내합니다.
http://openyourplan.com/OP/


* 화면 상, 하단에 위치한 <참가신청>아이콘을 누르시면 신청서 작성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이 답사는 모든 일정이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므로 참가취소시에는 다음과 같은 환불규정이 적용됩니다.

- 출발 7일전 취소시 100% 환불
- 출발 6일전 취소시 90% 환불
- 출발 5일전 취소시 80% 환불
- 출발 3-4일전 취소시 70% 환불
- 출발 2일전 취소시 60% 환불
- 출발 1일전 취소시 50% 환불
- 출발 당일 취소시 환불 불가
* 학교별 최소 인원 미달시에는 휴강될 수 있으며 휴강시에는 참가비가 전액 환불됩니다.

 

학교소개

김준혁 교장선생님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군주라고 평가받는 정조가 세운 ‘수원신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정조가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만든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습니다. 훗날 정조를 공부하면서 정조가 대유평이란 이름을 지은 의미를 알고, 미리 알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함께 등교할 때 힘들게 페달을 밟으면서도 하루에 한 꼭지씩 역사 이야기를 해준 것이 가슴에 남아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정조를 전공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이후 수원시가 본격적인 화성 복원 사업을 추진할 때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컨텐츠 개발에 참여하였고, 이후 화성박물관 건립을 주도하여 학예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신대학교에서 정조교양대학을 설립하면서 이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이 바로 정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있고, 화성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화성의 우수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조시대 개혁과 민본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성학교를 열며

 

최근 대한민국 역사교사 100명에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 100명을 추천받았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였습니다. 2위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고 3위가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백성의 나라, 그가 추진하였던 소통의 정책이 오늘 이 사회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가 과대 포장되어 그가 추진했던 모든 일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전근대 그 어떤 국가지도자들보다 백성을 위해 헌신한 그 같은 국왕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운 개혁기반도시 화성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찾는 역사문화도시가 된 것입니다. 화성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입니다. 성곽의 웅혼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아름다움이 곧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정조의 표현대로 화성의 아름다움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 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본주의입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참여한 기술자와 날품팔이들 모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막기 위한 척서단(滌暑丹)과 오늘날의 영양제인 제중단(濟衆丹)을 하사하고 겨울에 솜옷과 털모자를 주었습니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당상관 이상 되는 고위직들이나 썼던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축성에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하사하였으니 이들의 기쁨은 그 무엇보다 컸을 것이고 국왕의 따스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화성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라 조선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의식 혁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잔치를 하고, 여성이 상위에 남성이 하위에 자리하며, 조선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백성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은 근대화로 나가는 시대의 변화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모두 화성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화성 안에는 국방 개혁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최강의 군대라고 평가받는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이 주둔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가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예24기를 익히고 그 무예를 토대로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화약 신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성공시켰습니다. 중국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약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의 흔적이 지금 화성에 오롯이 남아 무예24기를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화성을 찾아가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조가 꿈꾼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주적인 나라만들기의 모든 것을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정조시대 역사의 길을 걸으며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국가,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 김준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