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소개

고을학교 12월★개강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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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    장:  최 연(고을인문지리기행전문가)
    주    제:  초겨울의 따뜻한 남도 답사, 경관 수려한 ‘호남의 승지(勝地)’
    기    간:  2021년 12월 19일(일)
    참가비:  10만원

강의계획

초겨울의 따뜻한 남도 답사, 경관 수려한 ‘호남의 승지(勝地)’

2021년 12월 고을학교는 <순창고을>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백신접종을 완료해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 관련,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와 대화 자제, 꼼꼼하게 손씻기, 기침-재채기 예절 등 예방수칙을 반드시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또는 본인이나 가족이 14일 이내 국내외 전염지역 방문을 한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겨울의 따뜻한 남도 답사길-.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2021년 12월 제81강으로, 경관 수려한 ‘호남의 승지(勝地)’ 전북 순창고을로 향합니다. ‘순창(淳昌)’이란 지명은 순창의 지형이 양(羊)의 모양으로, 순박하게 창성한다는 뜻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서거정은 <귀래정기>에서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 산수가 아름답고 논밭이 풍요로우며, 물가의 어장 또한 넉넉한 곳”이라고 감탄했습니다. 예로부터 ‘생거부안 사거순창(生居夫安 死居淳昌)’이란 말도 전해오듯이 이 고을은 자연의 조건이 살기에도 좋은 땅이면서 죽어서 묻히기도 좋은 땅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순창의 마음이 담긴 명산 강천산 풍광Ⓒ강천산군립공원

 

고을학교 제81강은 2021년 12월 19일(셋째 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1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쌍치면(관수당마롱암 암각서/영광정/훈몽재)-복흥면(낙덕정/김병로생가터)-팔덕면(강천사/삼인대)-순창읍(순창객사/순창향교/귀래정/설씨부인 및 신경준 유적)-유등면(신경준묘역)-동계면(구암정/장군목 요강바위)-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 순창객사 주변 식당가에서 개별 점심식사를 합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순창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1강 답사지인 순창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내장산과 섬진강을 품다

순창은 호남정맥의 동쪽에 위치한 서고동저의 산악지대입니다.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장수, 임실을 거쳐 순창에 이르러 순창 구석구석을 돌아 외이리에서 남원과 곡성을 향하는 큰 물줄기와 합류합니다. 평지가 적은 편이나 섬진강의 풍부한 수량 덕분에 남부에는 비옥한 순창분지가 발달하였습니다.

 

순창의 산줄기는 서쪽으로 내장산, 고당산, 국사봉, 매봉, 회문산, 성미산, 두류봉, 풍악산이 정읍, 임실, 남원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도집산, 대각산, 추월산, 복흥산, 용추봉, 광덕산, 금성산, 설산이 전남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군내에는 장군봉, 백방산, 깃대봉, 세자봉, 여분산, 무이산, 아미산, 용궐산, 무량산이 이어져 있습니다.

 

순창의 물줄기는 크게 추령천, 구림천, 양지천, 경천, 사천, 적성강으로 나뉘는데, 섬진강의 순창 지역 다른 이름인 적성강은 본류이고 나머지는 지류에 해당합니다.

 

추령천은 내장산의 소죽엄재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복흥면 정산리에서 북류하고, 구림천은 구림면 운북리 여분산과 단풍정 용추봉에서 시작된 두 물줄기가 남으로 내려오다가 월정리에서 북류하고, 양지천은 갈재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순창읍 복실리와 장덕리 사이를 지나 대동산에 이릅니다. 경천은 광덕산에서 발원하여 강천을 거쳐 동남쪽으로 팔덕면 중심부를 흐르고, 사천은 금과면 목동 봉황산에서 발원하여 금과면과 풍산면 사이를 흘러 순창읍 대동산 옆에서 섬진강과 만납니다. 섬진강은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를 지나 서쪽으로 감입곡류 하다가 동계면 회룡리를 급회전하면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를 적성강이라 달리 부릅니다.

 

▲강천산의 유서깊은 사찰 강천사Ⓒ순창군

 

마한의 영토로, 백제의 영토로

순창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 오산(烏山) 또는 옥천(玉川)이라 불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 도실군이라 하였고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에 편입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순화군으로 개칭되어 적성현과 구고현을 관할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순창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 순창현으로 강등되어 남원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1314년(충숙왕 1) 당시 국통(國統)인 정오선사의 고향이라 하여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09년(태종 9) 순창군이 18방(坊)을 관할하였으며, 이때부터 대체로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을 유지해 왔습니다. 1897년(고종 34) 18방을 18면으로 개편하여 집강을 두고 18면을 관할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8개면이 14개면으로 바뀌었으며 1979년 순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삼국시대 산성들

순창에는 삼국시대 산성인 합미성, 대모산성, 성미산성, 오교리산성, 옥출산성 등이 남아 있습니다.

 

합미성은 자라봉 북동쪽 해발 274.5m의 산 정상부에 포곡식으로 쌓은 백제시대 석성으로 전체 둘레는 약 484m입니다. 서문 터, 동문 터, 북문 터 등이 있으며, 대부분 성벽이 무너졌고 조금 남아 있는 서벽에는 성벽 상단에 너비 3m의 회랑도가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오수천을 이용한 교통로의 확보와 감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 할미성, 합민성 등으로도 부르는데 이는 고성(古城)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진안군 마령면의 합미산성과 남원시 인월면 합민성, 이백면 할미성 등과 같이 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한편 조선시대에 성을 보수하여 병사들의 군량미를 저장하였기 때문에 합미성이라고 한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어 조선시대에도 산성이 경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모산성은 경천이 휘감아 도는 대모산(150m)을 테뫼식으로 쌓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성곽은 거의 붕괴되었고 북쪽의 일부만 남아 있으며 성안 동쪽에 대모암이 있습니다. 동남으로 면한 수구 쪽에 남문 터가, 대모암 앞마당에 연못이, 대웅전 남쪽에는 샘이 있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도실군의 치소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북문 터의 동쪽 정상부의 평탄지에서 고려시대의 군창지가 확인되었고 ‘연우원년(延祐元年)’이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충숙왕 원년, 1314년입니다.

 

성미산성은 성미산(587.9m) 정상에 삼국시대에 쌓은 테뫼식 석성입니다. 지정학적으로 호남정맥을 가로질러 오가는 갈재가 훤히 바라보이는 험준한 산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실 옥정호에서 강진을 거쳐 내려오는 섬진강 유역도 조망되고 있어 육로와 수로를 이용한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유리한 곳입니다. 성의 둘레가 약 1.2㎞이고 성벽 대부분은 무너졌으며, 북서쪽과 남서쪽 일부에 석축의 흔적이 보이고 성안에는 건물 터의 초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들과 우물 한 곳이 남아 있습니다.

 

오교리산성은 가리산 북쪽 산자락의 봉우리(158.5m)에 삼국시대에 쌓은 테뫼식 석성으로, 둘레는 약 250m, 높이는 3m 내외이나 대부분이 무너졌고 성벽이 남아 있는 곳은 섬진강의 절벽 위에 쌓은 동벽뿐입니다. 성문은 남동쪽과 남서쪽, 그리고 북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산성의 동쪽에 있는 섬진강은 자연 해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안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동쪽 편의 대지에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해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섬진강 변에 위치하면서 수로를 이용한 교통로를 감시하는 한편, 백제 역평현의 피난성 또는 치소성으로 기능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옥출산성은 옥출산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석성인데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성벽의 둘레는 약 426m이며 서벽과 북벽은 자연 암반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하였고, 동벽과 남벽에 석축 흔적이 남아 있으며 동쪽 부분에 작은 계곡이 있습니다. 옥출산은 섬진강의 상류인 적성강의 서쪽에서 돌출된 산괴로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산의 남쪽에서 옥과천이 섬진강에 합류합니다. 옥출산 정상은 사방이 트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섬진강 유역이 훤히 내려다 보여 섬진강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감시하기 좋은 위치여서 전략적 측면에서 일찍이 산성이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순창객사는 최익현의 의병 항전지이기도 하다.Ⓒ순창군

 

순창의 객사와 향교

순창의 읍치구역에는 객사와 향교 등이 남아 있습니다.

 

순창객사는 창건연대는 1759년(영조 35)이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이 다음해 6월 의병을 일으켜 항전한 곳이기도 합니다. 원래 정당, 동대청, 서대청이 있었으며, 전면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에 낭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 남아 있습니다. 순창초등학교의 도서실과 교무실로 사용되어 오다가 현재는 비어 있으며, 1981년에는 전면을 해체하여 기와를 갈고 뒷면 북쪽 지붕의 서까래 일부를 교체하고 완전 보수하였습니다. 객사 신축 때 느티나무를 정원수로 많이 심었으나 현재 4그루만이 객사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순창향교는 1413년(태종 13)에 곡천 위에 창건된 후 군수 김수광이 북쪽의 옥천동으로 이건하였는데, 그때 전라도관찰사 몽암 이숙감이 비명을 썼습니다. 1661년(현종 2) 군수 윤종지가 현 위치인 추산 아래로 이축하였습니다. 1694년(숙종 20)에 낙뢰가 떨어져 거의 파괴되었던 것을 1702년(숙종 28) 군수 이기징이 부속건물 등을 복원하였고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군수 김인덕이 중수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건물은 대성전, 동무와 서무, 명륜당, 동재와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입니다. 5성, 10철, 송조6현, 동국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현포보 수로 및 중건불망비는 1792년(정조 16)에 세워졌습니다. 옛날 현포 일대의 평야는 관개시설이 없어 매년 흉작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때 김원보라는 사람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보(洑)를 만들라며 설치지점을 일러주었답니다. 이를 관아에 고하자 남원부사는 곧바로 보를 막고 1㎞ 가량의 석축수로를 냈습니다. 주민들은 김원보의 은혜를 잊지 못해 수로 언덕 위에 불망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김원보의 본관은 김해, 자는 여관, 호는 은옹입니다. 영조는 그의 수리사업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며 사마에 증하고 1747년(영조 23)에 능참봉에 봉했으나 임하지 않았으며 정조 대에 이르러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 되었습니다.

 

선비정신 깃든 서재와 정자들

순창에는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서재와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삼인대비는 1744년(영조 20)에 세운 것으로 도암 이재가 비문을 짓고, 정암, 민우수가 비문의 글씨를, 지수재 유척기가 전서를 썼습니다. 중종반정 후 반정공신들이 숙청당한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에게 폐비를 강요하여 신씨를 폐출하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章敬王后]로 맞아들였으나 10년만인 1515년(중종 10)에 사망하였습니다.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순창군수인 충암 김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유옥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에 모여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의 복위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고 각자의 관인(官印)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였습니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은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귀래정은 1457년(세조 2)에 신말주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4년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신말주는 신숙주의 아우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고 학문을 즐겨 145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에는 증광문과에 급제, 영전을 거듭했는데, 그 무렵 세조가 그의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분개하여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 순창 남산대로 내려와 귀래정을 짓고 시문을 벗 삼아 지냈다고 합니다. 정자 안에는 서거정이 지은 <귀래정기>와 강희맹의 시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귀래정은 1457년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에 의해 세워졌다.Ⓒ순창군

 

낙덕정은 하서 김인후가 을묘, 을사사화를 개탄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며 지은 정자입니다. 지금의 정자는 1900년(고종 37) 김노수가 낙덕암 바위 위 우거진 숲속에 팔모단층의 건물로 다시 세운 것으로 내부에 1칸의 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가 소년시절에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훈몽재는 호남유학의 산실

훈몽재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하서 김인후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당인데 1796년 정조가 그 존속 여부를 물었을 만큼 유명한 곳입니다. 정철,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등 당대 유명학자들이 하서의 가르침을 받았던 곳으로 호남유학의 산실로 불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김인후의 5세손 자연당 김시서가 1680년경 수축하고 그 옆에 하서의 유업을 계승하려고 김인후의 ‘자연가’에서 의미를 취해 자연당을 새로 지었습니다. 김시서는 우암 송시열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기절이 높아 당시 소하서로 불렸습니다.

 

관수당마롱암 암각서는 관수재 뒤편 큰 바위에 ‘觀水堂磨礱巖’이라고 행서로 새겨져 있으며 ‘尤庵書’라고 되어 있어 우암 송시열의 글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송시열의 아우 송시걸이 순창 군수로 재임(1672~1675)할 때 쓴 것으로 추측합니다. 당시 순창군 쌍치면의 종곡마을에는 송시열의 제자 농암 김택삼이 관수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었는데, 이때 송시열이 김택삼을 방문하고 써 준 것으로 보입니다. 관수당마롱암 암각서는 송시열의 글씨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활달하고 기백이 있는 후기의 필치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용정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활을 쏘며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순창 관아에서 지은 정자입니다. 신경준의 <여암유고> 교용정중건기에 “1655년(효종 6) 고을수령 이산뢰가 관덕정이란 이름으로 대교천 변에 처음 세운 뒤 1672년(현종 13) 군수 송시걸이 중건하였고, 우암 송시열이 교용정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1780년(정조 4) 군수 송문상이 중수한 것을 현재의 수령 홍익철이 수리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어은정은 어은 양사형이 1567년에 구미에서 이곳으로 분가하여 살면서 영하정을 지었는데 후손들이 어은정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으며 강 언덕에 세워진 정자 주위에는 100여년 생의 백일홍이 수십 그루 심어져 있습니다. 양사형은 1579년에 사마시에,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광군수,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봉해졌고 화산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구암정은 구암 양배를 배향한 지계서원 터에 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901년 호를 따서 세운 정자입니다. 양배는 그의 아우인 매당과 함께 학문과 덕망이 높아 연산 조에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무오와 갑자의 양대 사화로 대부분 어진 사람이 화를 당한 것을 보고 응하지 않고 이곳에서 고기를 낚으며 은거하였습니다.

 

영광정은 ‘기룡암’ 위 냇가에 있습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이 지방에 살던 금옹 김원중은 뜻있는 7명의 동지들과 함께 고의적으로 광인 행세를 하면서 은밀하게 이곳을 근거지로 잦은 모임을 갖고 의병을 모집하고 물자를 준비하여 항일 투쟁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8인의 애국동지의 뜻을 높이 추앙하고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영광정(迎狂亭)이라 하였습니다.

 

남파서실은 1910년에 세웠으며 남파 설진영이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사상을 배향하였던 곳입니다. 설진영은 1895년(고종 32)에 기우만과 함께 장성에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오랑캐는 상대할 수 없다고 하여 아미산 남쪽에 남파서실을 세우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많은 영재와 항일 애국지사를 배출하였습니다. 1940년 일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창씨개명에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다가 성(姓)을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는 내용의 절명시를 적은 유서를 남긴 채 서실 앞 우물에 투신 자결하였습니다.

 

▲훈몽재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하서 김인후가 지은 강학당으로, 호남유학의 산실이었다.Ⓒ순창군

 

남산마을은 신말주 후손들의 세거지

남산마을은 귀래정 신말주 후손들의 세거지로 신말주의 십로계첩, 귀래정, 설씨부인 권선문, 신경준의 고지도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경준의 유적지는 귀래정 신말주의 11대손인 여암 신경준의 출생지입니다. 신경준의 자는 순민이고 호는 여암이며 지리학과 언어학에 탁월한 조선후기의 실학자로서 천문, 지리, 성음, 율품, 의학, 복서, 역대의 헌장, 해외의 기서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저서는 <훈민정음운해> <일본증운> <언서음해> 등의 음운학서와 <강계지> <의표도> <산수경> <도로고> <산경표> 등의 지리서와 <여암집>이 있으며 왕명으로 <동국여지도>와 <팔도지도> 등을 감수하였고, 군사지도의 형식으로 작성한 옛날 지도 3매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설씨부인은 신말주의 부인으로 당대의 뛰어난 여류 문장가이자 서화가였으며 특히 순창 강천사의 복원을 위하여 <권선문(勸善文)>(보물 제728호)을 지었습니다. 신말주는 보한재 신숙주의 아우로서 전주부윤, 전라도 수군절도사, 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절개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사직하고 정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의 남산대로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을 짓고,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신경준의 묘는 부인 평창이씨와 합장묘로 유등면 오교리 섬진강을 따라 형성된 산자락 중턱 너머 화탄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행적을 기록한 음기도 없는 작고 초라한 묘비가 묘 앞에 세워져 있고 새로 세운 큰 비가 구비 옆에 있는데, 이 비에는 신경준의 행적을 기록한 음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건립연도가 무진년 4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연도는 불분명하나 신경준 사후의 무진년은 1808년(순조 8)과 1868년(고종 5)입니다.

 

화산서원은 1607년(선조 40) 귀래정 신말주, 충암 김정,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건재 김천일, 눌재 박상, 석헌 유옥, 이계 신공제, 어은 양사형, 자연당 김시서 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신경준이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던 곳으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마을 주민에 의하면 신경준 묘역 근처에 화산서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원길 묘는 부인과 합장한 봉토분으로, 묘역의 형태와 배치가 고려시대의 능묘와 매우 유사하며 옥천 조씨 시조의 설단과 함께 있는데 이곳은 풍수학에서는 ‘게[蟹]형’의 명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묘비는 1391년 아들 조유가 세운 것으로, 발견 당시 묘 앞 축대 둘레석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조원길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 옥천, 자는 성중, 호는 농은입니다. 공민왕 1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 시중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정몽주, 성장수와 함께 공양왕을 왕으로 받든 공으로 1등 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절의를 지켜 이색 등과 함께 5은(五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유서 깊은 사찰들

순창에는 강천사, 만일사, 구암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이 남아 있습니다.

 

강천사는 도선이 창건하였으며 1316년(충숙왕 3) 덕현이 5층석탑과 12개 암자를 창건하여 사세를 확장하였고, 1482년(성종 13)에는 신말주의 부인 설씨의 시주로 중창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사찰과 12개의 부속암자가 전소되었으나 1604년(선조 37) 태능이 강천사만 중창하여 이전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보다 비구니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창건자 도선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이 부찰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고 한 예언을 따라 절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사는 회문산 자락에 있으며 창건연대는 384년(백제 침류왕 원년)과 673년(신라 문무왕)의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조선 초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 나옹과 무학이 중창하고 1596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지홍과 원충이 다시 중창하였습니다. 원래의 만일사는 지금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200여m 위에 있었으나 1954년 중건할 때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만일사라는 명칭은 무학이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려고 만일동안 이곳에서 기도를 하였다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

 

‘만일사비’는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1978년에 봉합 복원되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석재가 노화되고, 비문이 마멸되어 현재 육안으로는 판독이 어려운 상황이나, 17세기 중엽 한때 ‘전라도’가 ‘전남도’로 개칭되었던 것, 회문산 내에 산성과 군진이 있었던 것, 무학이 중창한 사적 등이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 순창 지역 불교문화와 향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구암사는 624년(무왕 35) 숭제에 의해 창건되어 1392년 학운이 중창하였습니다. 사찰 동쪽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하였답니다. 예로부터 대종사들이 주석하였던 곳으로 영조 때 화엄종주 설파대사가 거주한 곳이며 이로부터 100여 년간 한국불교계의 화엄종맥의 법계가 계승된 사찰입니다. 헌종 때는 노사 기정진과 백파, 그리고 추사 김정희 등이 이곳에서 동거하면서 친교 수학하였습니다. 백파대종사의 설법으로 입산수도한 승려가 각처에서 운집하였으며 그 법맥이 선운사, 내장사, 백양사에 전법되었습니다. 구한말 양제 전우가 설유와 동거하며 교리를 연구하였으며 영호 박한영이 이곳에서 불학을 닦으며 근세 불교개혁을 위해 연구를 하였던 역사적 산실이기도 합니다.

 

 

▲장군목의 요강바위는 수만 년 동안 물결이 다듬어 만든 독특한 모습이 신비함을 자아낸다. Ⓒ순창군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보온차림, 마스크, 모자, 장갑,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해 만일에 대비하세요. 참고로 간편하게 가입할 수 있는 여행자보험 사이트를 안내합니다.

http://openyourplan.com/OP/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12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

*강의비, 교통비, 1회 식사비(아침김밥), 운영비 등 포함.

*코로나19 방역기간 동안 점심식사는 불포함이며 개별 자유식입니다.

*참가비 송금계좌는 국민은행 730601-04-041406 문화문 인문학습원. 버스 좌석은 참가접수순으로 버스 내 거리두기를 감안하여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은 현재 화면 상, 하단에 위치한 <참가신청> 아이콘을 누르시면 신청서 작성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문의는 050-5609-5609/010-9794-8494번(월∼금요일 14:00∼18:00시. 공휴일은 제외), 또는 이메일 huschool@naver.com을 이용해주세요.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당일 안에 보내드립니다.

▷간단한 참가신청방법 : 휴대폰 문자로 성명, 고을학교(12월), 그리고 가능하면 이메일 주소를 전화 010-9794-8494/010-5302-4256번으로 보내주시면 바로 처리해드립니다(준회원 대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https://www.huschool.com/을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 금감원의 보험사 개인정보 보안강화 규정으로 여행자보험 단체가입이 어렵고, 다른 보험에 가입한 경우 중복보장이 안 되는 등 실익이 크지 않아 여행자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은 개인 가입을 하시고, 이동시 '안전'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는 보험 가입이 돼 있습니다.

 

* 화면 상, 하단에 위치한 <참가신청>아이콘을 누르시면 신청서 작성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이 답사는 모든 일정이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므로 참가취소시에는 다음과 같은 환불규정이 적용됩니다.

 

- 출발 7일전 취소시 100% 환불

- 출발 6일전 취소시 90% 환불

- 출발 5일전 취소시 80% 환불

- 출발 3-4일전 취소시 70% 환불

- 출발 2일전 취소시 60% 환불

- 출발 1일전 취소시 50% 환불

- 출발 당일 취소시 환불 불가

* 학교별 최소 인원 미달 시에는 휴강될 수 있으며 휴강 시에는 참가비가 전액 환불됩니다.

 

학교소개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도자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고을학교를 열며...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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