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소개

고을학교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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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    장:  최 연(고을인문지리기행전문가)
    주    제:  천불천탑(千佛千塔)의 불국토! 거기는 어디인가
    기    간:  2020년 8월 23일(일)
    참가비:  11만원

강의계획

천불천탑(千佛千塔)의 불국토! 거기는 어디인가

2020년 8월 고을학교는 <화순고을>

 

*참가자는 코로나19 관련,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와 대화 자제, 꼼꼼하게 손씻기, 기침-재채기 예절 등 예방수칙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또는 본인이나 가족이 14일 이내 국내외 전염지역 방문을 한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8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8강은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산물인 고인돌 유적지, 무정형의 다양한 천불천탑이 펼쳐져 있는 운주사, 사림의 종장이며 개혁의 아이콘인 조광조의 유배지가 깃들어 있는 전남 화순고을로 향합니다(코로나19 상황으로 7월에 미뤘던 화순고을을 이번에 갑니다).

 

▲울창한 숲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연둔리 숲정이Ⓒ화순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78강은 2020년 8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8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도암면(운주사)-춘양면(고인돌유적지)-능주면(능주향교·조광조유적지·영벽정)-한천면(죽수서원)-동복면(연둔리숲정이·남덕원비)-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 시간을 갖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화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8강 답사지인 화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총 596기 고인돌이 10km에 펼쳐 있어

화순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이 군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영산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물줄기는 영산강수계와 섬진강수계로 나누어져 영산강은 서해로, 섬진강은 남해로 흘러듭니다.

 

화순의 지형은 대부분이 산지이고 능주면, 도곡면, 화순읍, 동복면 일대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입니다. 산천은 조화를 잘 이루어 운주사, 쌍봉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물염정, 환산정, 영벽정, 송석정, 임대정 등의 정자와, 규봉암, 노루목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 베틀바위, 만연폭포 등의 명승과, 너릿재, 운알재, 예재, 웅치 등의 고개가 발달하였습니다.

 

화순지역은 능주, 화순, 동복의 세 현으로 행정편제를 유지하였는데 백제시대에는 이릉부리군, 잉리아현, 두부지현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능성군, 여미현, 동복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에 능성군은 능성현으로, 여미현은 화순현으로 개칭하였고 1143년에 처음으로 능성에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1280년경 동복에, 1390년에 화순에도 감무가 파견되면서 비로소 중앙행정이 이곳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능성현, 화순현, 동복현으로 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의 피해가 너무 심한 화순현이 폐현을 자청하여 능성현에 합하였고 1611년에 비로소 화순현이 복현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당시 객관 앞에 심은 것이 바로 화순군청에 서 있는 은행나무입니다. 1895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능주군, 화순군, 동복군이 되었습니다. 1908년 화순군을 폐지하여 능주군에 흡수시키고 1913년 능주군을 화순군으로 개칭하고 동복군과 병존하다가 1914년 동복군 마저 화순군에 편입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고인돌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만들어진 선사시대 거석기념물로 무덤의 일종으로 형식의 다양성과 밀집도 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2000년에 전남 화순, 전북 고창, 인천 강화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화순 고인돌유적지는 도곡면 효산리에 277기, 춘양면 대신리에 319기 등 총 596기가 계곡을 따라 10km에 걸쳐 펼쳐져 있습니다. 화순 고인돌은 벼농사를 짓는 논 한가운데나 논 주변에 조성되어 있기도 하나, 대부분은 해발 65~125m 사이의 산기슭이나 거대한 바위산, 산과 산을 이어주는 고개 등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바둑판식(기반식)이 대부분이고 커다란 고인돌이 많은 것도 화순 고인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고인돌유적지 주변에는 고인돌을 만들고 남은 돌과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석재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효산리에 1124개, 대신리에 3543개의 석재가 고인돌 유적과 함께 섞여 있습니다.

 

▲장장 10km에 걸쳐 총 596기 고인돌이 장관을 보여준다.Ⓒ화순군

 

오성산성, 철옹산성, 비봉산성, 금오산성

화순의 산성은 오성산성, 철옹산성, 비봉산성, 금오산성 등이 남아 있습니다. 오성산성은 오성산(290.4m)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한 테뫼식 석성으로 전체 길이가 약 675m 정도입니다. 성벽의 축조는 대부분 편축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축조 시기나 배경과 관련된 문헌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화순읍에 가까운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시에 방어나 역습 등을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배후산성으로 판단됩니다. 성안에는 문지, 건물지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많은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정유재란 때 최경운과 화순향민들이 왜적을 맞아 전투를 벌이던 격전지로서 산정에는 <진사최공경운전망유허비>가 있습니다.

 

철옹산성은 옹성산(572.9m)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포곡식 석성으로 성벽은 협축법과 편축법을 함께 사용하였는데 길이는 대략 5,400m입니다. 동복면과 북면을 경계 짓는 지리적 요충지인 독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안은 수량이 풍부한 계곡과 넓은 활동공간이 있으며 3곳의 건물지, 2곳의 문지 그리고 우물터가 발견되었습니다.

 

비봉산성은 비봉산의 자연지형을 이용한 테뫼식 산성으로 918년(고려 태조 1)에 축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문헌 기록과는 달리 1256년 몽골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성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때 축조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거점으로 사용하였다고도 하나 모두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벽은 편축 혹은 협축으로 축조하였고 북벽과 서벽이 잘 남아 있습니다.

 

금오산성은 용암산(544.7m)의 자연암벽과 작은 계곡을 이용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으로서 경사도를 감안한 실제길이는 약 1,650m이며 성벽은 능선이나 암벽을 이용한 협축성으로 정형성을 갖추지 못하였지만 대체로 마름모꼴을 띠고 있습니다. 성내에는 문지 2곳, 건물지 3곳, 우물 1곳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천하절경 화순적벽Ⓒ화순군

 

절경! 적벽, 연둔리 숲정이마을, 야사리마을

화순에는 적벽, 연둔리 숲정이마을, 야사리마을 등 경관이 수승한 명승지가 많습니다.

 

화순적벽은 동복천의 상류인 창랑천 유역과 무등산에서 발원한 영신천이 합류해 약 7㎞에 걸쳐 형성된 작고 수려한 절벽입니다.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소동파가 읊었던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임억령, 김인후, 고경명, 김성일, 김창협, 정약용, 김삿갓 등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서적벽은 노루목적벽이라고도 하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웅장함이 장관입니다. 창랑적벽은 이서면 도석리의 뒷산 넘어 있으며 동쪽의 창랑리서 바라보면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물염적벽은 규모나 경치가 노루목적벽에 미치지는 못하나 언덕 위에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세운 ‘물염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김병연이 최후를 마친 절경지로 유명합니다. 보산적벽은 규모는 작으나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투어버스만 이용하여 관람할 수 있어 고을학교에서는 이곳을 둘러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연둔리 숲정이는 둔동마을의 동복천을 따라 왕버들, 느티나무, 서어나무, 검팽나무 등 230여 그루의 아름드리나무들이 1km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어우러진 숲으로 1500년경 마을이 형성되면서 인공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둔동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동복천 건너에 있는 구암리 규암에서 그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큰 재앙이 생긴다 하여 450여 년 전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강씨라는 성을 가진 만석꾼이 뒷산의 큰 바위를 가리기 위해 나무를 심었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자라 오늘날 울창한 숲이 되었다고 합니다.

 

야사리는 무등산에서 발원한 영산천을 따라 자연촌락이 형성되었고 1500년(연산군 6) 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노거수가 남아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집 뜰 한 구석에 있는 암나무로 수령은 500여 년으로 야사마을이 형성되면서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신통력이 있어 우는 소리를 내어 전란과 나라의 불운을 알렸다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은행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수호신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새해의 풍년과 행운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폐교된 동면중학교 이서분교 운동장 중앙에 있으며 학교 개교 당시 운동장을 조성할 때도 마을 당제를 지내는 느티나무로 보호하였다고 합니다. 운동장에 남아 있는 느티나무는 할머니 당산나무이고, 남쪽에 할아버지 당산나무가 따로 있었으나 지금은 고사되어 같은 자리에 새로운 나무를 심어 관리하고 있으며 지금도 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능성, 화순, 동복에 읍치구역

화순지역에는 능성, 화순, 동복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죽수 절제아문은 능성현 관아의 동헌인 녹의당의 정문으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녹의당과 함께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599년(선조 32)에 아문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602년(선조 35)에는 당대의 문필가인 정이가 객사인 능성관의 현판과 함께 쓴 ‘竹樹節制衙門’ 현판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1632년 능주목으로 승격된 뒤에도 동헌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능주향교는 <능주읍지>에 139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1416년(태종 16)에 능성현과 화순현을 합쳐 순성현으로 개칭하였다가 2년 뒤에 다시 분리되어 능성현이 되었는데 고을 개편이 되던 이시기와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0년(선조 33) 현령 하응도의 주선으로 중건되었습니다. 능주향교 은행나무는 암수 두 그루로 수령은 향교가 중수된 시기로 보아 약 48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순향교는 1430년(세종 12)에 대성전, 명륜당, 만화루가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1년(광해군 3) 화순현의 복현과 함께 현감 이인부에 의하여 대성전만 중건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현감 홍명하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되면서 이때 만화루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복향교는 1445년(세종 27)에 동복현감 하강지가 현재의 위치인 연월리에 향교를 건립하였습니다. 1655년(효종 6) 관아에 불이 나서 객사에 모셔진 전패가 소실되는 사건이 일어나 동복현이 없어질 때 향교도 함께 폐교되었습니다. 1664년(현종 5)에 현이 복구되고 향교도 복교되어 1701년(숙종 40)에 현의 남쪽 독상리로 이건 되었고 1756년(영조 32)에 다시 처음의 위치인 연월리로 옮겨졌습니다.

 

남덕원 비는 역원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비로 조선시대의 원비로서는 건립연대가 확인된 유일한 것입니다. 비문은 거친 사암질 자연석에 8행으로 새겨져 있으며 비문 내용에 나오는 심지헌은 동복현감으로 1666년 9월에 부임하여 1668년 7월에 이임하였습니다. 비석의 건립연대 또한 무신년 3월인데 이임하기 전 심지헌이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남덕원은 독상리 제궁동 입구 금계산 기슭에 있었던 역원으로 인근 한천리에 검부역이 생기면서 폐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검부역이 언제 설치되었는지 확실치 않아 남덕원의 폐지 연대도 추정이 불가능합니다.

 

고풍 어린 사대부 고택과 정자들

화순에는 사대부의 고택과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양참사댁 가옥 배치는 긴 네모꼴로 담장을 두르고 뒤쪽에 ㄷ자형 안채를 동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틀어서 배치하고 축을 맞춰 앞쪽에 사랑채를 두었습니다. 안마당과 사랑채는 담장 없이 그대로 이어 중문 칸을 사랑채 왼쪽에 작게 만들었고 중문 왼쪽 곁에는 세로로 헛간채를 두어 안마당의 남쪽을 막았습니다. 사랑마당 북동쪽 모퉁이에는 뒷간과 돼지우리가 사랑채 북쪽에는 광채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남도 양반주택의 인위적인 형태로서 안채는 18세기, 사랑채는 19세기 말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재고택은 양재국씨 가옥과 한집으로서 안채와 사랑채 관계에 있었다고 하나 두 집을 합해도 양반가옥의 공간 짜임새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유분방한 토호의 주택이었는데 중간에 집이 나뉘면서 부속건물이 헐리고 새로 지어지면서 지금과 같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벽정은 연주산의 경치를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 있게 바라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능주팔경의 하나인 영벽상천(映碧賞泉)입니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의 제영,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종직의 시로 보아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자는 9개의 시문이 있습니다.

 

학포당은 조선 중종대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이 사용한 서재로 현재의 건물은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1920년에 그 후손들이 현 위치에 복원한 것입니다. 85평이 넘는 경내에는 학포당 창건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노거수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학포당은 조선 중종대 학자이며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의 서재로, 복원한 것이다.Ⓒ화순군

 

삼충각과 칠충각의 충절

화순에는 삼충각과 칠충각 등 충신들의 사당이 있습니다.

 

삼충각은 1593년(선조 26) 진주성 제2차 혈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최경회와 문홍헌, 그리고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으로 해남 달량포에서 전사한 조현 등 3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685년(숙종 11)에 관민에 의하여 건립된 3동의 정려건물입니다.

 

최경회는 화순현에서 출생하여 1561년(명종 16) 진사가 되고, 1567년(선조 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영해군수 등을 지낸 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 전라우의병장이 되어 금산·무주·창원·성주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 창의사 김천일과 함께 9주야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습니다.

 

문홍헌은 능성현에서 출생하여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사로서 초토사 고경명을 따라 싸우다 금산에서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막하에서 진주성에 집결한 의병과 합류, 교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습니다.

 

조현은 능성현에서 출생하여 1555년(명종 10) 을묘왜란 때 가리포 첨절제사로서 영암(현 해남) 달량포에 침입한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능주의 포충사에 제향 되었습니다.

 

칠충각은 1634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화순에서 의거한 평택임씨 칠종형제인 임시계, 임시태, 임시민, 임시운, 임시준, 임시익, 임시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76년(고종 13)에 건립하였습니다. 이들 종형제는 화순의병과 함께 청주까지 진군하였으나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소식을 듣고 국가에 충성하지 못함을 통탄하고 귀향하여 은거생활 하다가 일생을 마치니 1876년(고종 13)에 이들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벼슬을 내렸습니다.

 

조광조 유배지의 유적들

조광조 유배지에는 ‘정암선생 적려유허추모비’ ‘영정각’ ‘초가3칸’ ‘애우당’이 있고, 유배지에서 멀지 않는 한천면 모산리에 죽수서원이 있습니다. 애우당에는 능성적중시, 절명시, 애우당기, 역모무고공술 등이 걸려 있는데 역모무고공술에는 조광조 최후의 진술이 적혀 있습니다. 추모비는 1667년(현종 8)에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가 세운 것으로 뒷면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초가와 영정각 등은 근래에 복원하였습니다. '죽수'는 능주의 다른 이름이며 서원에는 조광조와 함께 양팽손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용인의 심곡서원에도 두 사람의 위패가 함께 배향돼 있으며 죽수서원과, 심곡서원 모두 사액서원입니다.

 

조광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한양, 자 효직, 호 정암. 시호 문정, 개국공신 온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의 아들입니다. 어천찰방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에게 수학하였습니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에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교를 근본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창했고 도교를 추앙하던 기존 훈구파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하며 중종반정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103명 가운데 78명의 거짓 공적을 삭제했습니다. 도교 주관 제사였던 소격서도 없앴고 사회실천운동으로 덕업상권(좋은 행실 서로 권장), 과실상규(나쁜 행실 서로 규제), 예속상교(서로 사귐에 예의 지킴), 환난상휼(걱정거리나 어려운 일 서로 도와줌)을 4대 덕목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했습니다. 학행과 덕행, 성리학적 소양을 보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혁신을 추진할 인재를 따로 뽑았고 일부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에 나눠주는 균전제도 도입했습니다.

 

개혁에 대한 반대세력의 거센 저항으로 훈구세력과 반정 공신들이 한데 뭉쳐 조 씨가 역심을 품고 왕이 되려 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을 꾸몄습니다.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글씨를 갉아 먹도록 한 사건으로 1519년의 기묘사화입니다. 조광조는 붕당을 지어 요직을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투옥됐고 사형을 겨우 면하고 그해 11월 전라도 화순 능주(능성현)로 귀양 보내졌으나 유배 25일 만에 사약을 받고 절명시를 남겼습니다. 그의 나이 37살이었습니다.

 

愛君如愛父 임금을 아비 같이 사랑했고

憂國如憂家 나라를 내 집 같이 걱정했네.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땅을 굽어보니

昭昭照丹衷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이곳 유배지에는 조선시대 개혁정치의 상징인 정암 조광조와 호남의 큰 인물 학포 양팽손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양팽손은 조광조와 1510년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고 정계에도 함께 나아가 사림중심의 개혁정치를 구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시련이 닥쳤습니다. 양팽손은 개혁정치를 지키기 위해 사림을 대표해 조광조의 무죄를 주창했으나 이 일로 파직을 당해 고향 화순으로 내려와 학포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자신의 호 학포는 '포은 정몽주를 배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역모죄를 뒤집어 쓴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오자 양팽손은 날마다 조광조를 찾아가 세상과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조광조가 유배된 지 25일 만에 사약을 받았으나 역모에 엮이는 것이 두려워 모두들 그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양팽손은 주저하지 않고 조광조의 시신을 거둬 자신이 사는 데서 가까운 산골(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묻었고 제사도 지냈습니다.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졌고 조광조의 주검이 처음 묻힌 곳은 '조대감골' '서원터'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면암 최익현이 세운 정암 조광조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양팽손은 문장과 서화로 명성을 날리던 문신으로 조선 후기의 윤두서, 말기의 허련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데, 화순군 이양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16살엔 지지당 송흠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6세기 전반 조선 화단에서 화가로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는 16세기 한국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근경, 중경, 원경의 뚜렷한 3단 구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운주사 달빛 기행Ⓒ화순군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건립

화순에는 운주사와 쌍봉사에 많은 불교유적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건립은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상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의 기록으로 현존 석불석탑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양식적으로 보면 운주사의 석탑은 대부분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운주사 석탑들에서 통일신라 석탑들이 보여준 정형적인 감각은 사라지고 약간의 무계획적이고 거친 듯한 무작위의 기법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유적은 해발 100m 내외의 비교적 낮은 야산지대에 반경 약 200m 범위 내에 산재되어 있으며 1984년 전남대학교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굴된 유적은 석탑18기, 석불52구, 불두만 남아있는 석불 20여구, 홍치 8년 명 암막새기와, 해무리굽청자편, 범자문수막새 등입니다.

 

운주사의 주요 불상과 탑을 소개합니다.

 

와형석조여래불은 큰 돌을 다듬어 좌상과 입상을 만들었습니다. 좌상은 타원형의 상호에 길고 넓적한 귀는 이마에서 목까지 내려오고 눈은 반달형으로 눈꺼풀이 두껍게, 입술은 두툼하게 표현하였으며 육계는 별석으로 상호의 오른쪽에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입상은 좌상의 왼쪽에 있으며, 하나의 돌로 두 개의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좌상과 같은 조각수법을 보이고 상호는 길고 측면까지 잘 다듬은 형태로 이목구비의 표현은 좌상과 같습니다.

 

광배석불좌상은 상호는 원만하며 긴 코, 두툼한 입술, 육계는 파손되었습니다. 이마가 넓은 편이고 중앙에 백호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고 짧고 두툼한 목에는 삼도가 보이지 않고 법의는 우견 편단으로 옷 주름이 왼쪽 어깨와 오른쪽 소매에만 사선으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수인은 두 손을 합장하는 듯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지권인의 변형인지는 확실치 않고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길상좌입니다.

 

마애여래좌상은 육계는 두툼하게 솟았으며 머리와 이마가 거의 없고 희미한 눈썹과 긴 코는 양각이며 귓바퀴까지 새겼습니다. 표면에 균열과 탈락이 심하나 암벽의 요철부분을 그대로 살려 얕게 부조하였습니다. 광배석불좌상과 수인의 형태, 옷 주름 형태, 불상 쪽으로 새겨진 화염문 등이 매우 유사합니다. 제작연대는 광배석불좌상과 같은 고려 중기로 추정됩니다.

 

칠층석탑은 구층석탑 뒤편에 있으며 정제된 모습의 신라 탑형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방형의 기단은 1면에 4개 정도의 돌로 받치고 그 위에 거대한 석괴형 기단을 올렸습니다. 기단 주위로는 납작한 자연석으로 탑구를 돌리고 석괴형 기단과 탑구 사이에는 다시 방형 판석을 깔았습니다. 따라서 이 탑이 조성될 시기에는 탑구와 방형 판석을 깐 포석으로 주변을 정돈하고 그 중앙에 석괴형 기단을 놓고 탑을 세운 것입니다.

 

쌍교차문 칠층석탑은 광배를 갖춘 석불 좌상 앞에 있으며 높고 큼직한 1석의 방형 돌덩어리인 석괴형 기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초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짜 맞추고 앞·뒷면에는 쌍교차문을 두툼하게 양각하고 좌우 양면에는 양쪽 귀퉁이에 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들 우주와 탱주는 각각 보조 우주와 보조 탱주를 안쪽과 좌우에 새겼습니다.

 

석조불감 앞 칠층석탑은 석조불감의 남쪽 바로 앞에 위치한 탑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지 않고 그대로 탑신부를 얹었습니다. 지대석의 모습은 지하에 매몰되어 있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커다란 방형의 지대석 상부 면에 높이 5㎝ 가량의 방형 단을 표현하고 1층 탑신을 얹었는데 지대석은 운주사의 다른 탑과 마찬가지로 석괴형 기단입니다.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은 옥개석의 하면에는 옥개 받침이 6단의 각형 받침으로 표현되었고 모서리에서 중심을 향해 마치 목조 건축의 추녀목과 같은 두툼한 단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이런 양식은 한국석탑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특이한 사례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 없이 경사진 암반을 파내어 탑신을 세웠습니다. 면석의 안쪽으로 문선대와 같은 보조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보조우주의 표현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에서 간혹 보입니다.

 

칠성바위 앞 칠층석탑은 칠성바위 바로 앞의 큰 암반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 없이 암반을 파내어 탑신부를 세웠습니다.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의 모서리에 들림을 표현하였으며 낙수면도 평박한 편입니다.

 

발형 다층석탑은 주판알과 같은 모습으로 다듬은 둥근 돌을 중첩시킨 발형의 석탑으로 바루탑이라고도 하는 파격적인 이형석탑으로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3단의 각형 괴임을 마련하였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짜인 단층기단을 놓았고 탑신부는 원구형 부재 4개를 쌓아 올렸습니다. 1900년대에는 7층이었으나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 있습니다. 갑석을 8각으로 오해한 적도 있었으나 원형에 가깝고 운주사에서 기단갑석의 사례는 연화 탑과 함께 단 두 탑뿐입니다.

 

▲운주사 천불천탑의 풍경Ⓒ화순군

 

철감선사 도윤이 주석한 쌍봉사

쌍봉사는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적인선사 혜철이 839년에 중국에서 귀국하여 최초로 하안거를 지낸 곳이 쌍봉사라는 견해가 있어 이에 따르면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철감선사 도윤이 주석하면서 사세가 크게 번창하였는데 철감선사는 중국 소주 쌍봉사에서 도를 깨치고 돌아와 이 절에 주석하면서 절의 이름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철감선사는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8세 때 출가하여 귀신사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825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남천보원의 법을 이어받고 847년(문성왕 9)에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물면서 수행하였습니다.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의 개산조로 화순 쌍봉사로 이거하여 선풍을 떨치다가 868년(경문왕 8) 71세로 입적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혜조국사의 중창이 돋보이고 그의 제자이며 예종의 서자인 광지대사 지인은 쌍봉사에서 전륜대장(轉輪大藏)을 실시하였습니다. 고려 후기 쌍봉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최씨 무인 집권기로 최우는 1219년에 자신의 아들 최만전과 최만종을 수선사의 제2세 혜심에게 보내 출가시켰는데, 최만전이 주석하면서 쌍봉사의 사세는 더욱 융성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세조는 왕이 되기 전 쌍봉사에 들린 인연으로 1475년에 쌍봉사를 원당으로 삼고 어서(御書)와 5결의 전지(田地), 조세면제, 승려잡역 일체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숙종은 어필병풍, 대롱촉, 청류병, 황유리잔, 침장, 향로향합을 내렸고, 경종은 전지 4결을 내렸으며, 영조는 어필병풍을 하사하였습니다. 이처럼 왕실의 끊임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죽수서원의 속사(屬寺)가 되면서 조세부담이 많아져 쌍봉사의 유지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쌍봉사가 부담한 세역은 통신사, 사은사, 심양사, 동지사를 위한 부담, 중추부·규장각·수어청에 제공하는 부담, 수영이나 병영, 능주목에 부담하는 물품, 죽수서원에 부담하는 물품, 향교에 부담하는 물품 등 모두 66항목에 이르렀습니다.

 

1911년 사찰령으로 쌍봉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편재되어 본사의 사격을 잃었고, 1935년에는 오백 나한상은 백양사로 옮겨 봉안하였고 한국전쟁으로 사찰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고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은 사찰이 되었습니다. 삼층 목탑식 전각이었던 대웅전(보물 제163호)은 1984년 소실되어, 1986년 예전의 실측 자료를 토대로 복원하였습니다.

 

쌍봉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단아한 다포계 건물로 잡석으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축대위에 낮은 외벌대의 기단에 놓여 있습니다. 덤벙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우물천정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 띠살문입니다. 처마는 전면은 부연을 내달은 겹처마이고 배면은 흩처마이며 양측에 풍판을 달았습니다.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은 868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승탑은 하대에는 운문(雲紋)과 사자를 조각했고 상대에는 앙련 위에 팔각 괴임대를 놓고 탑신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 입상, 비천상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목조 건축물의 모습을 정밀하게 표현하여 통일 신라 시대 승탑 중에서 최고의 걸작에 속합니다. 탑비는 귀부와 이수는 남아 있으나 비신은 유실되었습니다.

 

쌍봉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보물 제1726호)은 1667년경 운혜를 비롯한 그의 일파 조각 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불상입니다. 17세기 중후반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했던 조각승 운혜의 경향을 잘 간직하고 있고, 더불어 과거에 시문된 고색창연한 채색 문양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마스크,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해 만일에 대비하세요. 참고로 간편하게 가입할 수 있는 여행자보험 사이트를 안내합니다.

http://openyourplan.com/OP/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8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1만원입니다(강의비,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비 송금계좌 국민은행 730601-04-041406 문화문 인문학습원). 버스 좌석은 참가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은 현재 화면 상, 하단에 위치한 <참가신청> 아이콘을 누르시면 신청서 작성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문의는 050-5609-5609/010-9794-8494번(월∼금요일 14:00∼18:00시. 공휴일은 제외), 또는 이메일 huschool@naver.com을 이용해주세요.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당일 안에 보내드립니다.

▷간단한 참가신청방법 : 휴대폰 문자로 성명, 고을학교(8월), 그리고 가능하면 이메일 주소를 전화010-9794-8494/010-5302-4256번으로 보내주시면 바로 처리해드립니다(준회원 대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 금감원의 보험사 개인정보 보안강화 규정으로 여행자보험 단체가입이 어렵고, 다른 보험에 가입한 경우 중복보장이 안 되는 등 실익이 크지 않아 여행자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은 개인 가입을 하시고, 이동시 '안전'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는 보험 가입이 돼 있습니다.


* 화면 상, 하단에 위치한 <참가신청>아이콘을 누르시면 신청서 작성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이 답사는 모든 일정이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므로 참가취소시에는 다음과 같은 환불규정이 적용됩니다.

- 출발 7일전 취소시 100% 환불
- 출발 6일전 취소시 90% 환불
- 출발 5일전 취소시 80% 환불
- 출발 3-4일전 취소시 70% 환불
- 출발 2일전 취소시 60% 환불
- 출발 1일전 취소시 50% 환불
- 출발 당일 취소시 환불 불가
* 학교별 최소 인원 미달시에는 휴강될 수 있으며 휴강시에는 참가비가 전액 환불됩니다.


 

학교소개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고을학교를 열며...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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